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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ler/블라디보스톡-이르쿠츠크(17.09.30~10.06)

[시베리아횡단열차] Russia 3. 어색하고, 아늑하고, 답답해.

Russia3.

시베리아

횡단열차

 

 

 

1.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

사실은 타 보면 별 거 없는데, 많은 사람들(=인천 사는 60대 남성=우리 아빠)의 버킷 리스트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기왕에 탈 거라면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톡에서 종착인 모스크바까지 가거나, 몽골이나 중국에서 국경을 넘는 것도 좋은 기록일 듯 하나, 기록은 기록이고 4일째부터는 조금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르쿠츠크까지가 딱 3박 4일이니, 이 정도가 괜찮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안씻는 사람들끼리 모여있다고 해도, 4일 정도 머리를 감지 않으면 정수리가 신경쓰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4일쯤 되면, 나의 냄새보다 너의 냄새가 심해.

 

테플로 호텔을 나올 때, 짐을 맡겨놓고 아주 당당하게 see you at 5! 라고 하고 나왔는데, 호텔에 도착하니 5시가 한참 넘어있었다.

독수리 전망대까지 가는 길을 찾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 낭비를 많이 했고, 돌아오는 데도 거리가 있어 시간이 꽤 걸렸다. 테플로 호텔에 오자마자 짐을 찾아서 열차에서 입을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온 김에 테플로호텔 화장실도 한 번 쓰고. 체크아웃까지 하고 알짱거리는 진상인데도, 친절하다.

열차에서는 화장실도 좁고, 사람도 많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기도 힘들고 캐리어를 펴서 뒤적거릴만한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환복은 나 자신과 주변을 모두 피곤하게 하므로, 대충 삼박 사일 내내 단벌 신사로 지내는게 좋다. 반팔티에 트레이닝 복이나, 운동용 레깅스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중간에 날씨가 추워지는 구간이 오기 때문에 입고, 잘 때 혹은 역에 정차할 때 입을 만한 벗기 편한 두꺼운 니트 같은 것도 있으면 좋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모든 시간표는 모스크바 기준으로 되어있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표준 시간대가 계속 변경되기 때문에 기준을 모스크바로 잡은 것 같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톡과 모스크바의 시차를 정확히 알아놓아야 한다. 모스크바 시간+7hr=블라디보스톡 시간이다. 독수리 전망대에서 테플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5hr로 착각하고,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바이칼 호수는 둘째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리턴 티켓은 이르쿠츠크에서 인천공항으로 되어있으니까. 다행히 열차 시간은 7시 10분이었고, 짐까지 찾아서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으로 돌아오니까 여섯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탑승일 100일 전에 티켓이 열리고, 인터넷에서 지정좌석으로 예약할 수 있다. 이미 예약을 해놓았다 하더라도, 기차역으로 들어와 티켓을 받아야한다.

 

(인터넷 예약이 끝나면 받는 E-ticket. 그저 예약 확인용이다)

 

 

 

이 나라에서 받은 티켓 중 가장 퀄이 좋다. 심지어 비행기 티켓보다 열차 티켓이 좋다.

홀로그램 스티커도 반짝반짝하니, 좋은 소장품이 되었다.

 

역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건너편의 마트에서 식료품 쇼핑을 해야한다. 역에 들어올 때마다 X-ray 검사대에 모든 가방을 올려놓고 검사 받아야 하는데,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종종 이 검사대에서 가방을 찾아가지 않아서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나다. 하바롭스크 공항에서 기념품 다 잃어버림. 하하. 인생.

티켓을 받아서 사진을 찍고 나니, 한국인 여자분들이 티켓을 받아야하는 거냐고 물어보신다. 아래층에 내려가서 티켓팅 해야한다고 대답해드리고, 기왕 코밍아웃 된거 짐 좀 맡아달라고 부탁드리고, 먹을 것을 사러갔다. 캐리어를 들고 마트갈 생각에 답답했는데 천만다행.

 

마트에서는 특별히 땡기는 음식이 없다.

열차 안에서 맘껏 쓸 수 있는 것은 뜨거운 물 뿐이기 때문에 컵라면 외 간식 정도이다.

그리고 고찡이랑 취향이 정반대로 갈린다.

"이거 살까?"하고 물어보면 칼같이 아니라고 한다.

피클도 한병 사려고 들었는데, 제일 작은 걸로 고르라고 하길래, 제일 작은 게 아니라 제일 싼 걸로 골랐다고 안심시켜줬다. 엄마랑 마트온 것 같다. 고르는 족족 다시 진열대로 돌아가는 느낌.

결국 각자 취향에 맞춰 샀다. 고찡은 내가 안먹는 빵과 감자칩을 샀고, 나는 고찡이 먹지 않을 듯한 피클과 사탕을 샀다. 우리 잘 안 맞는 것 같아.

둘이 마음이 맞아 산 건 인간사료같은 과자와 초콜렛뿐...

그마저도 마음이 맞은게 다행이다.

 

열차는 칼같이 떠나기 때문에 2~30분 전에 미리 플랫폼에 내려가 대기하면 된다.

 

(어마어마하게 길다.)

 

블라디보스톡이 첫번째 역이기 때문에 먼저 타면 열차 내부를 꼼꼼히 구경할 수 있다.

 

 

타면 이렇게 되어있는데, 시트 아래 쪽으로 24인치 캐리어까지는 넣을 수 있다.

그보다 작은 캐리어는 창가쪽 공간에 두는게 여러모로 편하다.

캐리어를 수시로 꺼내서 뒤적거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배낭이나 에코백에 양치세트나 수저, 물티슈, 화장품 등을 넣어두고 머리맡이나 그물망 선반을 펴서 놓으면 된다.

아래쪽에 콘센트가 있어서 멀티탭을 가져가면 전자기기를 이것저것 충전해서 사용할 수 있다.

고찡이 나름 준비성이 철저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E-book과 포켓 와이파이, 핸드폰을 동시에 충전하면서 잠들었는데, 간밤에 역무원이 깨워서 러시아어로 뭐라고 이야기했다. 아마 귀중품은 도난당하거나 분실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 같았다.

무서운 얼굴로 경고하길래 뭐라도 잘못한 줄 알고 잔뜩 쫄았는데, 친절한 충고였다.

러시아에서는 이런 일이 많다.

굉장히 크게 혼나는 줄 알았는데, 큰 도움을 준다거나 하는...

웃어줬으면 좋겠다.

 

좌석 배정 후에 여권과 표 검사를 다시 하고나면, 미리 신청했던 새 시트를 가져다 준다.

분명 새 시트를 신청했는데, 왜 내 이불과 배게는 더러울까, 동양인을 차별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바로 비닐을 뜯는 형태로 주는 거였다. 과도한 피해의식, 미안합니다. 하지만 뒤늦은 서비스, 반성하세요.

 

 

안에 이불용 시트, 베개용 시트가 들었고, 여분의 이불용 시트가 한장 더 들어있는데 아무래도 덮는 용도의 담요가 냄새가 심한 탓에 여분의 시트를 덮고 생활했다. 수건도 한 장 준다.

냄새가 심한 건 담요 뿐만 아니라, 독수리 전망대를 열심히 걷고, 양말도 벗지 않은 내 발도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고찡이 준비해온 스틱형 데오드란트 칠을 했다. 애초에 발에다 쓰려고 준비해온 거라고 한다.

나름 가정과 학교에서 충실히 교육받고, 교양있는 지성인 내지는 사회화가 잘 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씻지도 않은 발가락 사이사이로 꼼꼼히 데오드란트를 칠하려니 모멸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냄새가 향긋해져서 잊었다. 짧은 기억력과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행복은 동의어이다.

 

(Manner maketh Ma.....n....)

(망각과 행복의 발따봉)

 

열차에서는 뜨거운 물을 맘껏 이용할 수 있고, 컵과 티스푼도 빌려준다.

컵은 금속 컵홀더에 유리컵을 꽂아놓은 형태인데, 기념품으로 판매도 한다고 한다.

크게 욕심나지 않아 사진 않았다.

 

 

고찡이 체스 백판을 두고 싶다고 미니 체스판을 사왔다.

십년이 넘도록 제대로 체스 게임을 한 적이 없어서 체스에 자신 없다고 하고 시작했는데, 고찡이 잔실수가 많은 편이라 두 판 연속으로 이겼다.

'시험 망쳤어ㅠㅠ' 하고, 백점 맞은 얌체가 되는 기분이지만, 위닝이든 체스든 1:1로 붙는 모든 게임들은 이기면 놀려야한다. 신나게 깐족거리면서 뒀는데, 고찡이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우리 잘 안 맞는 것 같아. 남은 5일의 평화를 위해 깐족거림도 체스도 관두고 e-book을 다운받아서 책을 읽었다.

 

 

고찡에게 나미야잡화점의 기적 재밌냐고 물어보니, 감동적이고 재밌다고 한다.

단편 몇 편을 읽다가 접었다. 우리 잘 안 맞는 것 같아.

 

 

 

2. 수줍은 러시안들

 

크루즈 파티를 기대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탄 건 아니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수줍어도 너무 수줍다.

우리 맞은편, 옆쪽으로 두 가족과 어린 아이들이 탔는데, 굉장히 매너있게 아이들을 단속해주면서도 말 한마디 걸지 않는다. 하지만 내내 곁눈질로 몰래 쳐다본다. 하지만 다 티난다.

 

(나는 네가 매우 궁금하지만, 네가 나를 쳐다보는 건 무척 부담스러우니까 몰래 보는 척 할거야. 그러니까 아는 척 하지 말아줘. 나는 널 관찰할거지만 너는 널 관찰하는 나를 모른 척 해줘. 나도 몰래 보는 척 할테니까. 제발 말은 걸지 말아줬으면 해... 같은 느낌의 눈빛들

사진: 당진 엄마 친구네 강아지 두치, 1세 aka.쫄보견)

 

그 눈빛에 부담스러워할 사람은 난데, 왠지 그쪽에서 더 부담스러워하는 듯한 눈빛에 모른 척 해주기로 한다.

심지어 아침에 일어났는데, 애기들이 와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구경하길래 그냥 자는 척 해줬다.

인종차별이라던가, 그런 것보다는 그냥 생소한 외모에 생소한 언어를 쓰는 사람이 섞여있다는 게 신기하지만 말 걸었다가 내내 어색하게 갈까봐 걱정하는 듯한 느낌.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와중에도 이런 눈빛들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부담스러움이 중년~노년의 아주머니들 사이에서는 조금 덜한 편이다.

새벽 한시쯤 자다가 아주머니 한 분이 타셔서 일어나서 이불 꺼내는 거랑 이것저것 좀 도와드렸는데,

아침에 일어나서는 어디까지 가는지도 이야기하고, 컵을 어디서 받는지도 알려주고, 눈 마주치면 웃어주기도 한다.

아주머니 덕분에 이.르.쿠.츠.크.가 아니라 이르/쿠↗/츠크라고 해야하는 것도 알았다.

다만,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심도 깊은 이야기는 나눌 수가 없다.

아주머니 이후에 탄 여성분은 Where are you from? 이라는 문장도 다 잘라먹고 from?으로 대신할 정도이다.

 

러시아를 간다고 하면 다들 스킨헤드를 조심하라고 한다.

러시아로 유학간다고 하는 친구한테 나도 스킨헤드 조심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고작 일주일 러시아 여행해보고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치안이 엉망인 나라는 아니다.

어차피 다 사람 사는 곳.

게다가 이렇게 수줍은 사람들이라니...

역에 도착할 때마다 열정적으로 박수치고, 춤추며 노는 걸 상상했던 건 아닌데, 생각했던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반에서 제일 덩치크고 사납게 생겼지만, 사실은 화단을 가꾸는 것을 좋아하고,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을 즐겨 듣는 평화주의자인데, 내성적인 성격 탓에 오해를 받고 있다.' 정도의 일본 만화 캐릭터 설정 같다.

 

하바롭스크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또 다시 많이 탔다.

그리고나서, 맞은 편 일가족들은 모두 내리고, 러시아 청년들이 탔는데 아침 식사를 할 때 아무 말 없이 트윅스를 주고 갔다. 보답으로 맥심 믹스커피 스틱을 몇개 줬다. 그리고 점심에는 티벳계 러시안인 '다바'가 사과를 줬고, 그 다음날은 다시 다바가 서양배와 소세지를 줬다. 다바는 서울을 매우 사랑하고, 자발적으로 많이 도와줘서 선물용으로 가지고간 핸드크림 세 개를 선물로 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지. 그가 투 머치인 것을...

 

암튼 이런 것 저런 것들을 나눠주면서도 말 한마디 걸지 않는 게 참 신기하다.

이 모든 것들을 받아 먹었는데, 주는 동안은 말도 한마디 걸지 않는다. (다바마저도...)

 

 

 

 

 

3. 조용히 집중할 수 있어.(feat. 마트료시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외국인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화기애애하게 친구를 만들며 갈 수 있는 분위기로 착각하고 타고 싶어한다면 그냥 그만두는게 좋다. 러시아어를 못한다면 더더욱...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화기애애할 수 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가장 좋은 점은 조용하고, 침착하고, 어색한 적막이다.

규칙적으로 츠쿵츠쿵 소리도 들리고,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없고, 조용히 동양인을 살피는 눈길만 있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톡 기념품점에서 고찡이랑 이걸 샀다.

 

 

목각 마트료시카 인형에 밑그림만 칠해져 있는 거고, 물감이랑 붓이 따로 들어있다.

물감이랑 붓의 질은 썩 좋지 않지만 어차피 남아도는게 시간이니 천천히 칠하기만 하면 된다.

간단해보여도 은근 밑그림에 쓸데없는 디테일이 있어서 칠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아침식사하고, 내내 이것만 하고 점심을 먹었으니 꽤 오랜시간 동안 집중해서 했다.

 

 

 

(마지막 마트료시카는 인간 딸기를 만들려고 했는데 왜인지 인간 수박이 되어버림)

 

기념품점에서 파는 마트료시카가 화려하긴 해도 이목구비가 조금 부담스러운 편인데, 직접 만드니까 시간도 때우고, 담백하게 만들 수 있어서 좋다. 고찡과 한 세트씩 만들어서 각자 그물망에 넣어놨다.

 

(여기서도 극명하게 갈리는 너와 나의 색상차...)

 

 

 

마트료시카를 다 칠하고는 정말 할 게 없어서 빈둥거리다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했다.

고찡은 횡단열차 안에서 아무 것도 할 게 없으니, 평소에 읽지 못하는 책을 가져오겠다며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을 가져왔다. 그리고 군주론보다 멍하니 있는게 더 재밌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나는 와이파이가 될 때마다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받아서 읽고, 사피엔스를 받아서 조금 읽었다. 인터넷이 되는 시간이 매우 짧기 때문에 느긋하게 책을 고를 수 없다. 그저 베스트셀러 중 아무거나 찍어 읽어야한다. 그래도 읽는 시간은 느긋하다.

 

책을 읽다 지치면, 고찡과 일어나서 그나마 둘이서 할 수 있는 게임을 했다.

야구게임(숫자맞추기), 행맨, 빙고, 스무고개.

스무고개는 몇 판 하다가 그만 뒀다.

 

Q1. 생물이야? 무생물이야?

A1. 무생물.

Q2. 제조업에서 만드는거야?

A2. 응

Q3. (설마...)부품 3개 이상이야?

A3. 응

Q4. (설마...)움직여?

A4. 움직여

Q5. (설마...) 사람이 조종해야해?

A5. 응.

Q6. 기차냐...?

A6. ....응

Q7. 우리 좀 안 맞는 것 같지?

A7. .......

 

그러다가 저녁 쯤에 체스판을 다시 폈다.

세번째 판에서는 고찡이 이겼고, 정리하려는데 다바가 와서 자기도 껴달라고 한다.

지는 걸 싫어하는 고찡이 네가 하라며 등을 떠민다.

 

굉장히 순하고 수줍은 사람들인줄 알았는데, 체스 말 움직이는 건 되게 공격적이다.

고찡이랑 나는 폰이나 깨작 깨작하다가, 나이트랑 비숍 몇번 움직였다, 물렀다 하는데, 처음부터 이것 저것 움직이더니 되든, 안되든 체크부터 한다. 다바는 꽤 잘 두는 편이다.

나랑 고찡이랑 둘이 다바랑 한판씩 두니, 지나가던 러시아 아저씨가 한참을 쳐다보고 있길래 할거냐고 물어보니까 한다고 한다.

체스게임이 지겹기도 하고, 다바가 보여주는 서울 사진이 너~무 재미없어서 아저씨한테 나 대신 하라고 하고 자리를 비켜줬다.

수줍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체스는 공격적으로 둔다. 게임 내내 대화는 안해도 여기 사람들이랑 체스 두는 건 재밌다. 게다가 러시아인들이랑 체스 두고 있으면, 이제까지 곁눈질로만 보던 사람드리 눈을 빛내면서 체스판을 쳐다본다. 재미있는 승부욕이다.

 

낮에는 낮잠을 자다가도 시간이 남아서 고찡이랑 밀린 러시아어 공부를 했다.

여기서 해봤자 얼마나 도움되겠어, 싶은데 꽤 도움이 됐다.

대충 알고온 키릴자 발음도 다 외웠고, 1부터 10까지 숫자도 열차 안에서 다 외웠다.

어차피 블라디보스톡은 지천에 한국인이라 상관 없지만 이르쿠츠크부터는 영어고 뭐고 다 안통한다.

무조건 러시아어다. 늦게나마 열차에서 러시아어 공부 시작해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남아도는게 시간이니까.

 

 

4. 부담스러워!

러시아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담백하다.

상점에 뭘 사러 들어가도 모른 척 한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살 것을 정해서 가져올 때까지 손님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뭔가 팔려는 의지조차 없어보여서 사실상 사회주의가 남아있는 국가의 무기력함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냥 외국인이 익숙치않고, 살가운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듯 하다. 자본주의 미소가 없어 감정노동은 덜할 것 같다.

나중에는 친절하지는 않지만, 점원이 따라붙는 부담이 없어서 되려 편하게 돌아다녔다.

 

그런데 티벳계 러시아인에, 티벳불교 승려인 다바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한국인이랑 친해지려고 한다.

길게 정차하는 역에서 고찡이랑 같이 매점 음식을 사려고 했다.

뭐가 특별히 먹고싶었다기보다는 퀘스트 깨는 기분(?)으로 구경하고 사려고 했는데, 부탁하지 않았는데 다바가 굳이 도와줬다. 치즈를 먹고 싶어서 매점 아주머니에게 동그란 통에 담겨져 있는 치즈를 설명하느라고, 'round one!, cheese!'하는데, 자꾸 주스를 꺼내줬다. 생각해보니 구글번역기를 쓰면 되는 걸, 굳이 다바에게 설명해서 다시 매점 아주머니한테 전달... 왜 그랬지?

 

(여기가 그 매점...)

 

러시아인들도 하루 종일 열차 안에 있다보면 좀이 쑤시는지, 조금 길게 정차하는 역이 있으면 거기에 내려서 바람을 쐰다. 나랑 고찡도 매점 구경도 하고, 바깥 바람도 쏘일 겸 나가는데, 다바도 나와서 우리 주변을 맴돈다. 알고는 있지만 부담스러워서 딱히 아는 척 하진 않았다.

 

3일째 되는 날에는 그 부담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여행을 다니다 외국인을 알게 되더라도 전화번호나 메신져 아이디같은 개인 연락처는 알려주지 않고, 페이스북 친구 정도만 맺고 끝나는 편인데 다바가 카카오톡 친구추가를 이해 휴대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한다. 게다가 데이터가 안되니 다음 역에서 데이터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장난감 사달라고 떼쓰는 어린애 같아서 조금 짜증이 났다. 대화는 모두 구글 번역기와 '괜찮아?' '아니'정도의 짧은 한국어에 의존해서 하는데, 왜 1:1 메신져 계정이 필요한지 도무지 모르겠다. 게다가 셋이서 있다가 메신져 얘기가 나오자마자 고찡이 슬그머니 이층 침대로 올라가서 자는 척을 한다. 계속 쳐다봐도 도무지 돌아볼 생각을 안한다. 그래서 대충 종이에 적어주고 너무 늦었으니 자야겠다고 침대로 돌아갔는데, 계속 체스를 두던 맞은편 탁자에 앉아있다. 낮에 낮잠을 자서 e-book을 켜고 보고 있는데 삼십분쯤 지났을까, 다바가 와서 톡톡친다. 이제 데이터가 되니까 페이스북 계정을 찾아달란다. 개방된 공간이라도 침대는 암묵적으로 내 개인공간인데, 와서 계정을 쳐달라니까 조금 화가 났는데, 달리 할 수 있는게 없어서 페이스북 계정을 알려줬다. USIM이 있냐고 물어보길래, 와이파이를 쓰고 있다고 하니까 알았다고 하고 돌아간다. USIM을 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참 뒤에 오더니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한다. 그래서 그냥 못 알아듣는 척을 하니, 다바가 돌아갔다. 이때껏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고찡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고찡에게 어떻게 그 상황에 나를 버려두고 갈 수 있냐고 하니까, 상황이 잘 종료된 것 같길래 그냥 올라갔는데, 그렇게 심할줄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한다.

내 입장에서는 고찡이 올라간 시점이 기-승-전-결의 '승' 혹은 '전'이었기 때문에 '넌 친구가 곤경에 처하며 버려두는 타입이구나.' 라고 하니, 사실 자긴 조금 그런 면이 있다고 해맑게 웃는다.

그 날은 널 소시오패스라고 부를 수 밖에 없었다.

 

서운하긴 한데, 그 시점에서는 서로에게 빈정이 상했다기보다는 도를 지나친 부담스러움에 다바를 향해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심지어 아침에는 내가 양치하러 간 사이 아침에 고찡에게 와서 자기는 울란우데에 내리는데 바이칼 호수 얘기를 하며, 우리가 내리는 이르쿠츠크까지 따라올 듯한 뉘앙스를 내비쳤다고 한다. 울란우데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세네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더 현실성있는 협박이라 경악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 다바는 인사를 하고 울란우데에 내렸다. 울란우데에서 내리면서도 다시 돌아와서 바이칼호수와 불교에 관한 마그넷을 네개나 주고 갔다. 안받으면 따라올 것 같아서 고찡한테 빨리 받으라고 했다. 고찡에게 세개 양보하고, 바이칼호수의 흙이 들어있는 마그넷을 하나만 챙겼다. 집 냉장고에 붙여놓으면 그의 과한 친절이 생각날 것 같아서 한국에서 돌아와서 언니네 신혼집 냉장고에 붙이고 돌아왔다. 당연히 자초지종은 얘기하지 않고 언니네 집 냉장고에 붙였는데, 바이칼호수의 모래가 들어있어서인지 언니가 별 말 없이 받았다. 언니, 미안. 그치만 푸틴 마그넷이랑 바이칼 마그넷 중에 언니가 선택한거야.

 

 

5. 정수리가 간지러워서 외출을 했지.

 

생각해보면 몽골 여행은 그렇게 지저분하진 않았다.

이틀정도 씻지 못하는 날과 씻어도 씻은게 아닌 날들은 분명 있었지만, 나흘동안 머리를 못감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탄 건 007번 열차로, 나름 꽤 신식열차인데 그래도 화장실이 마냥 깨끗하진 않다.

그도 그럴게, 화장실 한칸을 수십명이 하루종일 나눠쓰고 있는데 깨끗할 리가 없다.

어쩌다 숨을 깊게 들이키면 구토가 밀려온다.

게다가 세면대도 손바닥 세개 합친 크기이고, 밖에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머리를 감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감는다해도 말리는 게 문제고.

몽골에서 버텼던 깜냥으로 이틀까진 버텼는데, 삼일째부터는 정수리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다.

고찡한테 말하니, 큰 역에 오랫동안 정차하면 바깥에 나가서 드라이샴푸를 하자고 한다.

몽골에서 가장 쓸모없었던 드라이 샴푸가 횡단열차에서는 꽤 실용적이다.

매일 하루에 한번씩 드라이샴푸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드라이 샴푸가 얼마나 행복한 기억이냐면, 바이칼호수나 블라디보스톡에서 찍은 모든 사진을 제쳐두고 저게 내 카톡 프사가 되었다.)

 

드라이 샴푸를 핑계로 큰 역에 정차할 때마다 밖에 나갔는데, 열차 내부 공기만 맡다가 밖에 나가면 굉장히 상쾌하다. 실은, 고찡이랑 나의 맞은편 침대 이층에 있는 러시아 사람에게서 너무나도 짙은 외국인 냄새가 났다. 침대에서 뒤척이기만 해도 외국인 냄새가 난다. 그 와중에 바깥 바람에서 나는 겨울 냄새를 맡으면 너무 신이 난다.

 

(대체로 탁 트여있어서 날씨가 좋으면 넓은 하늘을 볼 수 있다)

 

(다른 건 후져도 기차역 건물만큼은 잘 짓는 러시아)

 

(어차피 횡단열차가 자주오는게 아니라 여기서 이러고 놀다가 승무원 아줌마한테 혼났다.)

 

(주스는 맛있지만 포장이 엉망이야. 내 몰골도 엉망이야.)

명절이나 주말이면 바깥 공기 안마시고 집순이인 날이 더 많은데, 열차를 타고 외출을 더 많이한게 함정.

 

 

 

6. 드디어 탈출

 

열차에서는 의외로 꽤 규칙적인 생활을 했는데, 아침이 되면 모두가 부산스러워서 눈을 뜨게 되고 밤 9시에서 9시 30분 사이에 소등을 하기 때문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고찡은 약간 불면증이 있었는데 마치 요람에 있는 것처럼 기차가 규칙적으로 흔들리기 때문에 꿀잠잘 수 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열차에만 있다보니 날짜 감각이 없고, 두번 정도 표준시간대가 변경되어서 시간 개념이 흐려진다. 드라이 샴푸로 냄새와 기름은 막았지만 간질간질한건 어쩔 수 없어, 4일째가 되니 슬슬 내리고 싶다. 그리고 마침 4일째에 내린다.

 

횡단열차는 딱 4일이 좋은 것 같다. 삭발하고 가지 않는 이상 4일 이상은 무리다. 이걸 타고 모스크바에 간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지 몰라. 아저씨에 나오는 원빈처럼 한번 싹 밀고 싶더라. 그래서인지 4일째 되는 날은 내린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일어나서 옷도 갈아입고, 화장도 했다. 오후 세시 사십육분에 하차하는 건데 말이다.

 

오랜만에 친구만나러 외출하는 애처럼 싹 준비하고 나니까 내릴 때까지 다섯시간이 남았다. 하하.

그래도 다행인건, 이제까지 산과 숲, 들판이었던 풍경들이 어느새 물로 바뀌어있다. 바이칼 호수가 길다랗게 생겨서인지 아침부터 바이칼호수가 창밖으로 보인다.

 

 

이런 풍경이 창밖으로 계속 펼쳐지는데, 질리지가 않는다. 파도 치는 것도 재미있다.

간만에 고찡이랑 둘다 화장도 해서 한동안 찍지 않았던 셀카도 찍었다.

 

 

남은 음식도 먹어치우고, 버릴 건 버리고, 시트와 컵을 모두 반납하고 이것저것 하다보니 결국 내릴 때가 됐다.

드디어 바이칼 호수를 보러 간다는 생각에 너무 설렌다. 드디어 이 지루하고 지긋지긋하고 아늑한 공간을 탈출해서 드넓은 바이칼 호수를 본다. 앗뇽, 열차.

 

 

 

 

 

+ 시베리아 열차를 타면서 가장 많이 본 풍경

(기승전발이요.)